인크론슈타트 공국 Инкронштатска кнежевина Principality of Inkronstadt | |||||||||||||||||
공작기[1] | 공작가 문장 | ||||||||||||||||
Вода и мачъ![2] 물과 칼! | |||||||||||||||||
위치 | |||||||||||||||||
594년 ~ 711년 | |||||||||||||||||
성립 이전 | 칭제 이후 | ||||||||||||||||
베레스 수문령[3] | |||||||||||||||||
역사 | |||||||||||||||||
| |||||||||||||||||
지리 | |||||||||||||||||
인문 환경 | |||||||||||||||||
| |||||||||||||||||
정치 | |||||||||||||||||
| |||||||||||||||||
경제 | |||||||||||||||||
통화 | 빌베른 Denarxxj'貨[4] | ||||||||||||||||
언어별 명칭 |
1. 개요2. 명칭3. 상징4. 역사
4.1. 전사: 나르샤 가문과 베레스 수문령4.2. 빌베른 상인의 거류지4.3. 슬라브인의 도래와 혼인 동맹4.4. 베레스 강의 주인 (594~670)4.5. 670년 역병과 무티미르의 찬탈4.6. 인터르스키의 즉위4.7. 개종 (691)4.8. 서부 통일 (692~699)4.9. 스베틀라 강 연맹과의 전쟁 (700~709)4.10. 칭제 (711)
5. 지리5.1. 인크론슈타트
6. 정치7. 경제8. 사회9. 종교10. 군사11. 역대 공작12. 711년 이후: 인크론슈타트 공작13. 평가14. 여담1. 개요 [편집]
인크론슈타트 공국(사랜드어: Инкронштатска кнежевина 인크론슈타츠카 크네제비나)은 594년부터 711년까지 남랜드 평원 서부의 베레스 강 유역에 있었던 공국이다. 고대 사랜드 제국의 서부 수리관 가문인 나르샤 가문의 상속녀 세미라와, 북서쪽에서 이주해 온 슬라브인 수장 보이슬라프의 혼인으로 성립했다. 117년 동안 7대의 공작이 다스렸으며, 711년 7대 공작 인터르스키가 평원을 통일하고 차르를 칭하면서 제정 사랜드로 이어졌다.
공국은 옛 제국의 수문과 슬라브인의 칼이 결합해 태어난 나라였다. 나르샤 가문은 400년 가까운 분열기 동안 베레스 강 상류의 고대 대수문을 지켜 왔지만 거듭된 역병으로 이를 지킬 사람을 잃었고, 보이슬라프의 종사단은 칼은 있었으나 정착할 땅과 명분이 없었다. 두 집안의 혼인으로 생겨난 공국은 대수문을 쥐고 하류의 영주들을 물로 굴복시켰으며, 강 굽이에 자리 잡은 빌베른 상인들과의 교역으로 은과 철을 얻어 종사단을 키웠다. 691년 공작 인터르스키가 동로마의 선교사에게 세례를 받으면서 공국은 교회의 조직과 문서 행정까지 손에 넣었다. 물과 칼, 은과 교회라는 네 기둥 위에서 공국은 분열기의 수많은 영주 가운데 홀로 평원을 통일할 힘을 갖추었다.
공국은 711년 제정에 흡수되어 사라졌지만 그 흔적은 1917년까지 제정의 곳곳에 남았다. 공국의 수도 인크론슈타트는 1661년까지 제정의 수도였고, 그 뒤에도 차르의 대관식이 열리는 곳이었다. 공작가의 은빛 성탑 문장은 제정 국장의 그리핀 가슴에 박혔으며, 공작이 즉위할 때 대수문을 손수 열던 관습은 차르 대관식의 '수문 의식'이 되었다. '인크론슈타트 공작'이라는 칭호는 제위 계승자의 칭호로 1,200년 넘게 이어졌다.
공국은 옛 제국의 수문과 슬라브인의 칼이 결합해 태어난 나라였다. 나르샤 가문은 400년 가까운 분열기 동안 베레스 강 상류의 고대 대수문을 지켜 왔지만 거듭된 역병으로 이를 지킬 사람을 잃었고, 보이슬라프의 종사단은 칼은 있었으나 정착할 땅과 명분이 없었다. 두 집안의 혼인으로 생겨난 공국은 대수문을 쥐고 하류의 영주들을 물로 굴복시켰으며, 강 굽이에 자리 잡은 빌베른 상인들과의 교역으로 은과 철을 얻어 종사단을 키웠다. 691년 공작 인터르스키가 동로마의 선교사에게 세례를 받으면서 공국은 교회의 조직과 문서 행정까지 손에 넣었다. 물과 칼, 은과 교회라는 네 기둥 위에서 공국은 분열기의 수많은 영주 가운데 홀로 평원을 통일할 힘을 갖추었다.
공국은 711년 제정에 흡수되어 사라졌지만 그 흔적은 1917년까지 제정의 곳곳에 남았다. 공국의 수도 인크론슈타트는 1661년까지 제정의 수도였고, 그 뒤에도 차르의 대관식이 열리는 곳이었다. 공작가의 은빛 성탑 문장은 제정 국장의 그리핀 가슴에 박혔으며, 공작이 즉위할 때 대수문을 손수 열던 관습은 차르 대관식의 '수문 의식'이 되었다. '인크론슈타트 공작'이라는 칭호는 제위 계승자의 칭호로 1,200년 넘게 이어졌다.
2. 명칭 [편집]
'인크론슈타트'라는 이름은 슬라브인이 오기 전부터 베레스 강 굽이에 있던 빌베른 상인 거류지의 이름에서 나왔다. 6세기 초 빌베른 상인들은 베레스 강 하구에서 배를 몰고 강을 거슬러 올라왔는데, 배가 더는 올라갈 수 없는 대수문 바로 아래의 강 굽이에 창고와 부두를 짓고 이곳을 엔크론스타트(Enqronstaat')라 불렀다. 빌베른어로 '굽이의 장터'라는 뜻이다. 반세기 뒤 이 땅에 들어온 슬라브인들은 이 이름을 그대로 받아들여 인크론슈타트(Инкронштат)라 불렀다.[7]
19세기에는 이 이름이 고대 사랜드어에서 왔다는 주장이 한때 유행했다. 고대 제국 계승론을 앞세우던 낭만주의 학자들은 제정의 요람이 외국 상인의 장터에서 시작되었다는 사실을 달가워하지 않았고, 고대 사랜드어로 '물의 문'을 뜻한다는 말에서 이름의 기원을 찾으려 했다. 그러나 7세기 빌베른 상인의 장부와 공국 초기의 교회 문서가 모두 빌베른식 이름을 쓰고 있어, 오늘날에는 빌베른 기원설이 정설로 받아들여진다.
군주의 칭호인 크네즈(Кнез)는 본래 슬라브인들이 부족의 수장을 부르던 말로, 한국어로는 공작으로 옮긴다. 나라 이름 '크네제비나'(кнежевина)는 '크네즈가 다스리는 땅'이라는 뜻이다. 당대의 외국 사료에서 부르는 이름은 저마다 달랐다. 빌베른 상인들은 공작을 '엔크론스타트의 왕'이라 적었고, 동로마의 사료는 다른 슬라브인 군주들과 마찬가지로 '아르콘'(ἄρχων)이라 불렀다.
19세기에는 이 이름이 고대 사랜드어에서 왔다는 주장이 한때 유행했다. 고대 제국 계승론을 앞세우던 낭만주의 학자들은 제정의 요람이 외국 상인의 장터에서 시작되었다는 사실을 달가워하지 않았고, 고대 사랜드어로 '물의 문'을 뜻한다는 말에서 이름의 기원을 찾으려 했다. 그러나 7세기 빌베른 상인의 장부와 공국 초기의 교회 문서가 모두 빌베른식 이름을 쓰고 있어, 오늘날에는 빌베른 기원설이 정설로 받아들여진다.
군주의 칭호인 크네즈(Кнез)는 본래 슬라브인들이 부족의 수장을 부르던 말로, 한국어로는 공작으로 옮긴다. 나라 이름 '크네제비나'(кнежевина)는 '크네즈가 다스리는 땅'이라는 뜻이다. 당대의 외국 사료에서 부르는 이름은 저마다 달랐다. 빌베른 상인들은 공작을 '엔크론스타트의 왕'이라 적었고, 동로마의 사료는 다른 슬라브인 군주들과 마찬가지로 '아르콘'(ἄρχων)이라 불렀다.
3. 상징 [편집]
3.1. 문장 [편집]
공작가 문장 | 제정 사랜드 국장 |
594~711 | 711~1259 |
공작가의 문장은 자주 바탕에 은빛 성탑을 그린 방패다. 성탑은 베레스 강 상류의 대수문을 지키던 나르샤 가문의 수문탑을 그린 것으로, 공국의 정통성이 대수문에 있음을 나타냈다. 자주는 고대 제국에서 총독과 고위 수리관이 입던 관복의 색으로, 나르샤 가문이 분열기 내내 지켜 온 색이었다. 은빛은 수문을 지나 흐르는 물을 뜻한다고 전해진다. 슬라브인 공작들은 이 문장을 처가의 것으로 받아들였는데, 혼인 약정에 따라 대수문을 다스리는 자는 나르샤 가문의 문장을 써야 했기 때문이다.
나르샤 가문은 고대 제국 수리 관청의 그리핀 인장도 대대로 물려받았다. 그러나 공국 시절에는 그리핀을 문장에 넣지 않고, 인장을 수문 열쇠와 함께 가문의 보물로만 간직했다. 그리핀이 문장에 오른 것은 711년 인터르스키가 차르를 칭하면서였다. 인터르스키는 고대 제국의 계승자임을 내세우기 위해 그리핀을 공작가의 문장 위에 얹었고, 이후 은빛 성탑은 제정 국장에서 그리핀의 가슴에 박힌 작은 방패로 남았다.
3.2. 깃발 [편집]
공국 시절의 깃발은 실물이 남아 있지 않다. 7세기 빌베른 상인의 기록에는 공작의 배가 '자줏빛 천에 은실로 탑을 수놓은 깃발'을 달고 있었다는 묘사가 있다. 1858년 페타르 3세의 문장 개혁 때 이 묘사를 바탕으로 깃발을 재현해 인크론슈타트 공작, 곧 제위 계승자의 깃발로 정했으며, 오늘날 공국의 깃발로 쓰이는 그림도 이때의 도안이다.
3.3. 표어 [편집]
공국의 표어는 "물과 칼!"(Вода и мачъ!)이었다고 전해진다. 12세기에 편찬된 《인크론슈타트 연대기》에 따르면, 594년 혼인 때 세미라가 보이슬라프에게 "나는 물을 가져오고 당신은 칼을 가져온다"고 말한 데서 나왔다. 실제로 이 말을 했는지는 확인할 수 없지만, 물과 칼이 결합한 공국의 성격을 잘 보여 주는 표어로 제정 시대 내내 인크론슈타트의 상징으로 쓰였다.
4. 역사 [편집]
공국의 역사를 전하는 가장 중요한 사료는 12세기 인크론슈타트 대주교좌에서 편찬된 《인크론슈타트 연대기》다. 연대기는 공작가를 정교 신앙의 수호자로 그리기 위해 개종 이전의 일을 짧게 다루거나 미화한 대목이 많아, 학자들은 빌베른 상인의 장부와 서신, 동로마의 사료, 그리고 20세기 이후의 발굴 성과를 함께 놓고 연대기를 검토한다.
4.1. 전사: 나르샤 가문과 베레스 수문령 [편집]
베레스 강은 북부 고원의 기슭에서 발원해 서쪽 바다로 흘러드는 강이다. 기원전 2세기 고대 사랜드 제국의 수리 관청은 강이 고원 기슭의 협곡을 빠져나와 평원으로 들어서는 곳에 거대한 돌 수문을 쌓았다. 이것이 훗날 대수문이라 불리게 되는 베레스 강 상류의 수문으로, 여기서 갈라져 나간 수로들이 평원 서부의 들판을 적셨다. 대수문에서는 동쪽으로도 긴 운하가 뻗어 나가 평원 중부 스베틀라 강의 지류와 이어졌는데, 사람들은 이를 옛 물길이라 불렀다.
대수문과 서부의 수로를 관리한 것은 제국의 서부 수리관이었고, 기원후 1세기 무렵부터 이 직책은 나르샤 가문이 대대로 이어받았다. 3세기 말 로마의 침략으로 제국이 무너지자, 나르샤 가문은 대수문을 근거지로 삼아 스스로 베레스 강 상류의 영주가 되었다. 이 가문의 영지를 후대에는 베레스 수문령이라 부른다.
분열기의 나르샤 가문은 대수문으로 하류를 다스렸다. 하류의 영주들이 공납을 거부하면 가문은 여름 가뭄철에 수문을 닫았고, 물이 끊긴 들판의 영주들은 곧 굴복했다. 분열기 평원에서 정치의 일상적인 무기가 된 '분수'를 가장 오래, 가장 능숙하게 쓴 집안이 나르샤 가문이었다. 그러나 수문과 수로를 유지하는 데에는 많은 사람이 필요했다. 535년의 역병은 수로를 청소하고 둑을 쌓을 일손을 앗아 갔고, 6세기 중엽부터 수문령의 수로는 하나둘 흙에 묻혔다. 옛 물길도 이 무렵부터 중간중간 막혀 제 구실을 하지 못하게 되었다.
대수문과 서부의 수로를 관리한 것은 제국의 서부 수리관이었고, 기원후 1세기 무렵부터 이 직책은 나르샤 가문이 대대로 이어받았다. 3세기 말 로마의 침략으로 제국이 무너지자, 나르샤 가문은 대수문을 근거지로 삼아 스스로 베레스 강 상류의 영주가 되었다. 이 가문의 영지를 후대에는 베레스 수문령이라 부른다.
분열기의 나르샤 가문은 대수문으로 하류를 다스렸다. 하류의 영주들이 공납을 거부하면 가문은 여름 가뭄철에 수문을 닫았고, 물이 끊긴 들판의 영주들은 곧 굴복했다. 분열기 평원에서 정치의 일상적인 무기가 된 '분수'를 가장 오래, 가장 능숙하게 쓴 집안이 나르샤 가문이었다. 그러나 수문과 수로를 유지하는 데에는 많은 사람이 필요했다. 535년의 역병은 수로를 청소하고 둑을 쌓을 일손을 앗아 갔고, 6세기 중엽부터 수문령의 수로는 하나둘 흙에 묻혔다. 옛 물길도 이 무렵부터 중간중간 막혀 제 구실을 하지 못하게 되었다.
4.2. 빌베른 상인의 거류지 [편집]
520년경 빌베른 상인들이 베레스 강 하구에서 강을 거슬러 올라와 대수문 아래의 강 굽이에 거류지를 세웠다. 배가 더는 올라갈 수 없는 이 굽이는 서부 평원의 곡물과 북쪽 삼림의 모피, 밀랍이 모이는 곳이었다. 나르샤 가문은 상인들에게 거류지를 허락하는 대가로 통행세와 은을 받았다. 상인들은 거류지를 목책으로 두르고 창고와 부두를 지었으며, 거류지의 우두머리를 뽑아 자기들의 법으로 다스렸다. 이 거류지의 이름이 '엔크론스타트', 곧 훗날의 인크론슈타트다.
535년 역병 뒤 일손이 모자라게 된 나르샤 가문에게 빌베른 상인의 은은 갈수록 중요해졌다. 가문은 은으로 떠돌이 전사들을 고용해 영지를 지켰지만, 고용된 전사들은 은이 끊기면 떠나거나 오히려 영지를 약탈했다.
535년 역병 뒤 일손이 모자라게 된 나르샤 가문에게 빌베른 상인의 은은 갈수록 중요해졌다. 가문은 은으로 떠돌이 전사들을 고용해 영지를 지켰지만, 고용된 전사들은 은이 끊기면 떠나거나 오히려 영지를 약탈했다.
4.3. 슬라브인의 도래와 혼인 동맹 [편집]
6세기 후반 북서쪽에서 들어온 슬라브인 집단이 평원 서부의 버려진 땅을 차지하기 시작했다. 580년대 베레스 강 중류에 자리 잡은 보이슬라프의 무리는 그 가운데 가장 강한 집단이었다. 보이슬라프는 300명 남짓한 기마 종사단을 거느렸고, 상류의 수문령과 강 굽이의 거류지를 여러 차례 위협했다.
나르샤 가문의 마지막 영주 다르바 나르샤에게는 딸 세미라 하나뿐이었다. 연대기에 따르면 다르바는 늙고 병든 몸으로 보이슬라프와 직접 담판했고, 594년 세미라를 보이슬라프에게 시집보내는 혼인 약정을 맺었다. 약정은 세 가지 조건을 담고 있었다.
나르샤 가문의 마지막 영주 다르바 나르샤에게는 딸 세미라 하나뿐이었다. 연대기에 따르면 다르바는 늙고 병든 몸으로 보이슬라프와 직접 담판했고, 594년 세미라를 보이슬라프에게 시집보내는 혼인 약정을 맺었다. 약정은 세 가지 조건을 담고 있었다.
- 보이슬라프와 그 종사단은 대수문과 수문령을 지킨다.
- 대수문의 열쇠와 수리 관청의 그리핀 인장은 세미라가 낳은 자식에게만 물려준다.
- 나르샤 가문을 섬기던 옛 사랜드계 수문지기들은 지금의 직책을 그대로 지킨다.
혼인식 날 보이슬라프는 대수문의 수문탑에서 수문지기들의 충성 맹세를 받고 '크네즈'를 칭했다. 연대기는 이 594년을 공국의 시작으로 적는다. 다르바는 2년 뒤인 596년 세상을 떠났다.
혼인은 양쪽 모두에게 살길이었다. 나르샤 가문은 은으로 살 수 없는 충성스러운 칼을 얻었고, 보이슬라프의 무리는 떠돌이 약탈자에서 고대 제국 수리관의 사위가 되었다. 공국은 처음부터 슬라브인 전사 귀족과 옛 사랜드계 수문지기라는 두 계통이 함께 다스리는 나라였으며, 이 이중 구조는 공국의 끝까지 이어졌다.
4.4. 베레스 강의 주인 (594~670) [편집]
보이슬라프(594~619)는 주변의 다른 슬라브인 집단들을 굴복시키고, 정복한 집단의 사람들을 수로 공사에 동원해 흙에 묻힌 수로를 되살렸다. 수로가 살아나자 들판이 넓어졌고, 들판이 넓어지자 공작이 거두는 물세도 늘었다. 칼로 사람을 모으고, 그 사람으로 물길을 되살리고, 그 물길로 다시 칼을 먹이는 순환이 이때 시작되었다.
보이슬라프와 세미라의 아들 라도슬라프(619~641)는 두 계통의 피를 함께 이은 첫 공작이었다. 어머니에게서 옛 사랜드어를, 아버지에게서 슬라브어를 배운 그는 두 언어를 모두 썼다고 한다. 634년 라도슬라프는 빌베른 상인들과 베레스 협약을 맺어, 공국 안에서의 교역 특권을 빌베른 상인들에게만 주는 대신 공작이 거래액의 10분의 1을 통행세로 받고 빌베른제 철제 무기를 우선 사들이기로 했다. 이 협약으로 공국은 평원 서부의 어느 영주보다 많은 은과 좋은 무기를 갖게 되었다.
프로시고이(641~658)는 북쪽 고원에서 내려오는 고랜드 제후들의 약탈에 맞서 대수문 북쪽의 협곡에 성채를 잇달아 쌓았다. 블라스티미르(658~670) 때 공국은 베레스 강 상류와 중류를 모두 다스리게 되었다. 665년 여름 중류의 영주들이 연합해 공납을 거부하자, 블라스티미르는 한여름에 대수문을 40일 동안 닫았다. 연대기가 '목마른 여름'이라 부르는 이 일로 중류의 들판이 말라붙었고, 영주들은 가을이 오기 전에 모두 공작 앞에 무릎을 꿇었다.
보이슬라프와 세미라의 아들 라도슬라프(619~641)는 두 계통의 피를 함께 이은 첫 공작이었다. 어머니에게서 옛 사랜드어를, 아버지에게서 슬라브어를 배운 그는 두 언어를 모두 썼다고 한다. 634년 라도슬라프는 빌베른 상인들과 베레스 협약을 맺어, 공국 안에서의 교역 특권을 빌베른 상인들에게만 주는 대신 공작이 거래액의 10분의 1을 통행세로 받고 빌베른제 철제 무기를 우선 사들이기로 했다. 이 협약으로 공국은 평원 서부의 어느 영주보다 많은 은과 좋은 무기를 갖게 되었다.
프로시고이(641~658)는 북쪽 고원에서 내려오는 고랜드 제후들의 약탈에 맞서 대수문 북쪽의 협곡에 성채를 잇달아 쌓았다. 블라스티미르(658~670) 때 공국은 베레스 강 상류와 중류를 모두 다스리게 되었다. 665년 여름 중류의 영주들이 연합해 공납을 거부하자, 블라스티미르는 한여름에 대수문을 40일 동안 닫았다. 연대기가 '목마른 여름'이라 부르는 이 일로 중류의 들판이 말라붙었고, 영주들은 가을이 오기 전에 모두 공작 앞에 무릎을 꿇었다.
4.5. 670년 역병과 무티미르의 찬탈 [편집]
670년 평원에 다시 역병이 돌았다. 블라스티미르와 종사단의 많은 전사가 이 역병으로 죽었고, 아홉 살의 맏아들 고이니크가 어머니 드라가나의 섭정 아래 공작이 되었다. 그러나 고이니크는 이듬해인 671년 갑자기 죽었다. 공식 사인은 역병이었지만, 연대기는 "그의 죽음을 두고 사람들이 수군거렸다"고만 적었다. 블라스티미르의 아우 무티미르가 종사단을 이끌고 공작의 자리를 차지했고, 드라가나는 세 살 난 둘째 아들 인터르스키를 데리고 강 굽이의 빌베른 거류지로 달아났다. 무티미르는 빌베른 상인들과의 교역이 끊길 것을 두려워해 거류지를 치지 못했다.
이때 수문지기들의 우두머리인 수문지기장 카샤르는 대수문의 열쇠와 그리핀 인장을 품고 거류지로 함께 달아났다. 열쇠와 인장은 세미라의 자손에게만 물려준다는 혼인 약정이 있었지만, 무티미르 역시 세미라의 증손이었기 때문에 카샤르의 행동은 약정이 아니라 블라스티미르의 적통을 따르겠다는 선택이었다. 이 선택은 공국의 운명을 바꾸었다.
무티미르(671~688)는 17년 동안 열쇠 없는 공작으로 다스렸다. 수문지기들은 그를 공작으로 인정하지 않고 일을 게을리했으며, 무티미르는 칼로 수문 기술자들을 부렸으나 수로를 제대로 관리하지 못했다. 680년대에는 중류의 수로가 다시 막히기 시작했고, '목마른 여름'의 공포에서 풀려난 중류 영주들이 잇달아 공납을 끊었다. 공국은 블라스티미르 시대의 절반 남짓한 영역으로 줄어들었다.
이때 수문지기들의 우두머리인 수문지기장 카샤르는 대수문의 열쇠와 그리핀 인장을 품고 거류지로 함께 달아났다. 열쇠와 인장은 세미라의 자손에게만 물려준다는 혼인 약정이 있었지만, 무티미르 역시 세미라의 증손이었기 때문에 카샤르의 행동은 약정이 아니라 블라스티미르의 적통을 따르겠다는 선택이었다. 이 선택은 공국의 운명을 바꾸었다.
무티미르(671~688)는 17년 동안 열쇠 없는 공작으로 다스렸다. 수문지기들은 그를 공작으로 인정하지 않고 일을 게을리했으며, 무티미르는 칼로 수문 기술자들을 부렸으나 수로를 제대로 관리하지 못했다. 680년대에는 중류의 수로가 다시 막히기 시작했고, '목마른 여름'의 공포에서 풀려난 중류 영주들이 잇달아 공납을 끊었다. 공국은 블라스티미르 시대의 절반 남짓한 영역으로 줄어들었다.
4.6. 인터르스키의 즉위 [편집]
인터르스키는 빌베른 거류지에서 자랐다. 그는 빌베른 상인들의 말과 셈법을 배웠고, 바다 건너 동로마 제국의 황제와 교회, 성벽으로 둘러싸인 도시들의 이야기를 들으며 자랐다. 연대기는 그를 "말을 타기 전에 장부를 먼저 읽은 공작"이라 적었다.
688년 무티미르가 사냥 중 말에서 떨어져 죽자, 공작 회의는 무티미르의 아들 스트로이미르와 인터르스키 사이에서 갈라졌다. 스무 살의 인터르스키는 카샤르가 지켜 온 대수문의 열쇠와 인장, 그리고 빌베른 상인들에게서 빌린 은을 들고 거류지를 나왔다. 수문지기들이 일제히 그의 편에 섰고, 은으로 밀린 녹봉을 받은 종사단의 다수가 그에게 돌아섰다. 인터르스키는 수문탑에서 대수문을 손수 열어 공작의 자리에 올랐고, 스트로이미르는 북쪽 고원으로 달아났다.[8]
688년 무티미르가 사냥 중 말에서 떨어져 죽자, 공작 회의는 무티미르의 아들 스트로이미르와 인터르스키 사이에서 갈라졌다. 스무 살의 인터르스키는 카샤르가 지켜 온 대수문의 열쇠와 인장, 그리고 빌베른 상인들에게서 빌린 은을 들고 거류지를 나왔다. 수문지기들이 일제히 그의 편에 섰고, 은으로 밀린 녹봉을 받은 종사단의 다수가 그에게 돌아섰다. 인터르스키는 수문탑에서 대수문을 손수 열어 공작의 자리에 올랐고, 스트로이미르는 북쪽 고원으로 달아났다.[8]
4.7. 개종 (691) [편집]
689년 빌베른 상선을 타고 동로마 제국의 수도사 테오도로스 일행이 인크론슈타트에 왔다. 인터르스키는 이들을 거류지 시절부터 알던 손님처럼 맞았고, 691년 부활절에 종사단과 함께 대수문 아래 베레스 강에서 세례를 받았다. 연대기는 이날 강물이 "수문에서 떨어지는 물소리가 성가처럼 들렸다"고 적었다.
인터르스키가 개종한 까닭에 대해 연대기는 신앙의 깨달음만을 말하지만, 학자들은 세 가지 계산이 함께 작용했다고 본다. 첫째, 동로마 황제의 인정을 받아 분열기의 수많은 영주 가운데 '세례받은 군주'라는 격을 얻을 수 있었다. 둘째, 교회는 글을 아는 사람들의 조직이었다. 성직자들은 물세와 공납을 장부에 적고 약정과 명령을 문서로 남겼는데, 이는 옛 사랜드계 수문지기들의 행정을 넘어서는 것이었다. 셋째, 동로마와 교역하는 빌베른 상인들에게 공국은 믿을 만한 거래 상대가 되었다.
692년 인크론슈타트에 주교좌가 설치되고 테오도로스가 초대 주교가 되었다. 공작은 대수문 곁에 돌로 된 성 게오르기 성당을 짓기 시작해 698년 완공했다. 개종에 반발한 일부 종사단과 슬라브 토착 신앙의 사제들이 693년 봉기했지만 곧 진압되었다.
인터르스키가 개종한 까닭에 대해 연대기는 신앙의 깨달음만을 말하지만, 학자들은 세 가지 계산이 함께 작용했다고 본다. 첫째, 동로마 황제의 인정을 받아 분열기의 수많은 영주 가운데 '세례받은 군주'라는 격을 얻을 수 있었다. 둘째, 교회는 글을 아는 사람들의 조직이었다. 성직자들은 물세와 공납을 장부에 적고 약정과 명령을 문서로 남겼는데, 이는 옛 사랜드계 수문지기들의 행정을 넘어서는 것이었다. 셋째, 동로마와 교역하는 빌베른 상인들에게 공국은 믿을 만한 거래 상대가 되었다.
692년 인크론슈타트에 주교좌가 설치되고 테오도로스가 초대 주교가 되었다. 공작은 대수문 곁에 돌로 된 성 게오르기 성당을 짓기 시작해 698년 완공했다. 개종에 반발한 일부 종사단과 슬라브 토착 신앙의 사제들이 693년 봉기했지만 곧 진압되었다.
4.8. 서부 통일 (692~699) [편집]
인터르스키는 무티미르 시대에 떨어져 나간 중류의 영주들부터 다시 굴복시켰다. 그는 블라스티미르처럼 수문을 닫아 위협하는 한편, 먼저 항복한 영주에게는 수로를 다시 뚫어 주고 물세를 깎아 주었다. 물을 끊는 칼과 물을 주는 손을 함께 쓰는 이 방식으로 중류는 3년 만에 다시 공국의 손에 들어왔다.
697년 공국은 베레스 강 하구를 장악했다. 하구는 빌베른 상선이 드나드는 바다의 관문으로, 이로써 공국은 바다에서 대수문까지 베레스 강 전체를 다스리게 되었다.[9] 699년에는 서쪽 국경인 벨라 강까지 이르러 평원 서부의 통일을 마쳤다.
697년 공국은 베레스 강 하구를 장악했다. 하구는 빌베른 상선이 드나드는 바다의 관문으로, 이로써 공국은 바다에서 대수문까지 베레스 강 전체를 다스리게 되었다.[9] 699년에는 서쪽 국경인 벨라 강까지 이르러 평원 서부의 통일을 마쳤다.
4.9. 스베틀라 강 연맹과의 전쟁 (700~709) [편집]
서부를 통일한 공국 앞에는 평원 중부의 스베틀라 강 연맹이 있었다. 연맹은 스베틀라 강 유역의 호족들이 모인 느슨한 연합으로, 서부의 강자로 떠오른 인크론슈타트를 두려워한 호족들이 700년 먼저 공국의 동쪽 변경을 쳤다. 이후 10년 가까이 이어진 전쟁은 처음 몇 해 동안 승패 없이 서로의 변경을 약탈하는 싸움이었다.
전쟁의 흐름을 바꾼 것은 옛 물길이었다. 인터르스키는 703년부터 2년에 걸쳐 반세기 넘게 막혀 있던 옛 물길을 다시 뚫었는데, 705년 봄 되살아난 물길은 대수문의 물을 스베틀라 강 지류로 흘려보내 연맹 서부의 들판을 적셨다. 연맹 서부의 호족들은 반세기 만에 다시 물이 들어오는 것을 반겼다. 그러나 706년 여름 인터르스키는 옛 물길의 수문을 닫았다. 한 해 전 물을 믿고 들판을 넓혔던 연맹 서부는 가뭄과 굶주림에 빠졌고, 서부의 호족들은 하나둘 연맹을 떠나 공작에게 항복했다. 후대의 사가들은 이를 '수문 전쟁의 완성'이라 불렀다. 같은 해 인크론슈타트 주교좌는 대주교좌로 승격되었다.
707년 연맹의 맹주 즈보니미르는 남은 호족들을 모아 반격에 나서 베레스 하구의 부두와 빌베른 상인의 창고를 불태웠다. 인터르스키는 709년 여름 종사단과 농민 징집병을 이끌고 스베틀라 강 중류로 진군했다. 스베틀라 강의 여울목 브로드에서 벌어진 브로드 전투에서 공국의 기병은 여울을 건너려던 연맹군을 측면에서 무너뜨렸고, 즈보니미르는 강물 속에서 전사했다. 이듬해까지 연맹의 남은 호족들이 모두 항복하면서 평원 중부도 공국의 손에 들어왔다.
전쟁의 흐름을 바꾼 것은 옛 물길이었다. 인터르스키는 703년부터 2년에 걸쳐 반세기 넘게 막혀 있던 옛 물길을 다시 뚫었는데, 705년 봄 되살아난 물길은 대수문의 물을 스베틀라 강 지류로 흘려보내 연맹 서부의 들판을 적셨다. 연맹 서부의 호족들은 반세기 만에 다시 물이 들어오는 것을 반겼다. 그러나 706년 여름 인터르스키는 옛 물길의 수문을 닫았다. 한 해 전 물을 믿고 들판을 넓혔던 연맹 서부는 가뭄과 굶주림에 빠졌고, 서부의 호족들은 하나둘 연맹을 떠나 공작에게 항복했다. 후대의 사가들은 이를 '수문 전쟁의 완성'이라 불렀다. 같은 해 인크론슈타트 주교좌는 대주교좌로 승격되었다.
707년 연맹의 맹주 즈보니미르는 남은 호족들을 모아 반격에 나서 베레스 하구의 부두와 빌베른 상인의 창고를 불태웠다. 인터르스키는 709년 여름 종사단과 농민 징집병을 이끌고 스베틀라 강 중류로 진군했다. 스베틀라 강의 여울목 브로드에서 벌어진 브로드 전투에서 공국의 기병은 여울을 건너려던 연맹군을 측면에서 무너뜨렸고, 즈보니미르는 강물 속에서 전사했다. 이듬해까지 연맹의 남은 호족들이 모두 항복하면서 평원 중부도 공국의 손에 들어왔다.
4.10. 칭제 (711) [편집]
711년 8월 15일, 성모 안식 축일에 인터르스키는 성 게오르기 성당에서 대주교 테오도로스의 손으로 관을 받고 전사랜드의 차르를 칭했다. 고대 제국이 무너진 지 400여 년 만에 평원에 다시 하나의 군주가 선 것이다. 대관을 마친 인터르스키는 성당을 나와 대수문으로 가서, 나르샤 가문에게서 물려받은 열쇠로 수문을 손수 열었다. 공작이 즉위할 때 대수문을 열던 공국의 관습이 차르의 대관 의례로 옮겨 간 것으로, 이것이 1917년까지 이어진 '수문 의식'의 시작이다.
차르가 된 인터르스키는 공작가의 은빛 성탑 문장 위에 고대 수리 관청의 그리핀을 얹고, 이듬해인 712년 평원의 모든 수문과 수로가 차르에게 속한다고 선언한 수문법을 반포했다. 공국의 영토는 차르의 직할령이 되었고 공국은 이로써 사라졌다. 다만 '인크론슈타트 공작'이라는 칭호는 사라지지 않고 제위 계승자에게 넘어갔다.
차르가 된 인터르스키는 공작가의 은빛 성탑 문장 위에 고대 수리 관청의 그리핀을 얹고, 이듬해인 712년 평원의 모든 수문과 수로가 차르에게 속한다고 선언한 수문법을 반포했다. 공국의 영토는 차르의 직할령이 되었고 공국은 이로써 사라졌다. 다만 '인크론슈타트 공작'이라는 칭호는 사라지지 않고 제위 계승자에게 넘어갔다.
5. 지리 [편집]
공국의 중심은 베레스 강이 북부 고원 기슭의 협곡을 빠져나와 평원으로 들어서는 곳이었다. 협곡 입구에 대수문이 있었고, 그 바로 아래 강 굽이에 수도 인크론슈타트가 있었다. 대수문에서 갈라진 수로들은 부채꼴로 퍼져 베레스 강 상류의 들판을 적셨는데, 이 들판이 공국의 본령이었다.
평원 서부는 반건조 대륙성 기후로, 연 강수량이 400mm 안팎에 그쳐 비만으로는 곡물 농사가 불안정했다. 들판의 수확은 거의 전적으로 수로의 물에 달려 있었고, 수로의 물은 대수문에 달려 있었다. 대수문을 쥔 자가 서부를 쥔다는 공국의 정치는 이 기후에서 나왔다.
공국의 영역은 시기에 따라 크게 달라졌다. 594년 성립 당시에는 대수문 주변의 상류 들판뿐이었으나, 블라스티미르 때인 660년대에는 베레스 강 중류까지 넓어졌다. 무티미르 시대에 절반 가까이 줄었던 영역은 인터르스키의 서부 통일로 699년 베레스 강 유역 전체와 벨라 강까지 약 20만km²에 이르렀고, 709년 스베틀라 강 연맹을 복속한 뒤에는 약 35만km²가 되었다.
평원 서부는 반건조 대륙성 기후로, 연 강수량이 400mm 안팎에 그쳐 비만으로는 곡물 농사가 불안정했다. 들판의 수확은 거의 전적으로 수로의 물에 달려 있었고, 수로의 물은 대수문에 달려 있었다. 대수문을 쥔 자가 서부를 쥔다는 공국의 정치는 이 기후에서 나왔다.
공국의 영역은 시기에 따라 크게 달라졌다. 594년 성립 당시에는 대수문 주변의 상류 들판뿐이었으나, 블라스티미르 때인 660년대에는 베레스 강 중류까지 넓어졌다. 무티미르 시대에 절반 가까이 줄었던 영역은 인터르스키의 서부 통일로 699년 베레스 강 유역 전체와 벨라 강까지 약 20만km²에 이르렀고, 709년 스베틀라 강 연맹을 복속한 뒤에는 약 35만km²가 되었다.
5.1. 인크론슈타트 [편집]
공국 시절의 인크론슈타트는 서로 다른 세 구역이 강을 따라 늘어선 도시였다. 가장 위쪽의 협곡 입구에는 대수문과 나르샤 가문의 수문탑, 수문지기들의 집이 모인 수문 구역이 있었다. 그 아래 언덕에는 보이슬라프가 세운 목책 성채와 종사단의 집들이 들어선 그라드가 있었고, 가장 아래의 강 굽이에는 빌베른 상인들의 거류지가 있었다. 692년 이후에는 수문 구역의 대수문 곁에 성 게오르기 성당이 들어섰다. 700년경 도시의 인구는 1만 2천 명 남짓으로 추정된다.
세 구역은 공국의 세 기둥을 그대로 보여 주었다. 위에는 옛 제국의 물이, 가운데에는 슬라브인의 칼이, 아래에는 빌베른의 은이 있었다. 훗날 제정 시대의 인크론슈타트는 그라드 자리에 차르의 궁을, 성 게오르기 성당 자리에 성모안식 대성당을 두었고, 거류지는 상인 구역이 되었다.
세 구역은 공국의 세 기둥을 그대로 보여 주었다. 위에는 옛 제국의 물이, 가운데에는 슬라브인의 칼이, 아래에는 빌베른의 은이 있었다. 훗날 제정 시대의 인크론슈타트는 그라드 자리에 차르의 궁을, 성 게오르기 성당 자리에 성모안식 대성당을 두었고, 거류지는 상인 구역이 되었다.
6. 정치 [편집]
6.1. 공작 [편집]
공국의 군주는 공작(크네즈)이었다. 공작의 자리는 세미라의 자손 가운데 남자에게 이어졌으며, 대개 선대 공작이 맏아들을 후계자로 지명하고 공작 회의가 이를 받아들이는 방식이었다. 그러나 670년 이후의 혼란에서 보듯 지명만으로 자리가 정해지지는 않았고, 종사단과 수문지기의 지지를 얻는 쪽이 공작이 되었다.
새 공작은 수문탑에서 즉위했다. 수문지기장이 대수문의 열쇠를 바치면 공작은 그 열쇠로 대수문을 손수 열었고, 물이 수로로 흘러가면 모인 사람들이 새 공작을 환호했다. 열쇠를 받는 것은 나르샤 가문의 정통을 잇는다는 뜻이었고, 수문을 여는 것은 공작이 물을 나누어 주는 자라는 뜻이었다. 무티미르가 17년 동안 공작으로 인정받지 못한 것도 이 의식을 치르지 못했기 때문이다.
새 공작은 수문탑에서 즉위했다. 수문지기장이 대수문의 열쇠를 바치면 공작은 그 열쇠로 대수문을 손수 열었고, 물이 수로로 흘러가면 모인 사람들이 새 공작을 환호했다. 열쇠를 받는 것은 나르샤 가문의 정통을 잇는다는 뜻이었고, 수문을 여는 것은 공작이 물을 나누어 주는 자라는 뜻이었다. 무티미르가 17년 동안 공작으로 인정받지 못한 것도 이 의식을 치르지 못했기 때문이다.
6.2. 두 계통의 통치 [편집]
공국의 통치는 두 계통으로 나뉘어 있었다. 슬라브인 종사단은 싸움과 공납 징수, 성채의 방어를 맡았고, 옛 사랜드계 수문지기들은 수문과 수로, 물세와 물 분쟁을 맡았다.
- 종사단: 공작을 따르는 기마 전사들로, 공작에게서 녹봉과 전리품을 받고 그 대가로 목숨을 바쳤다. 종사단의 우두머리들은 정복한 땅에 성채를 받아 다스렸는데, 이들이 제정 시대 대귀족 '벨리카시'의 원형이다.
- 수문지기: 나르샤 가문을 섬기던 옛 사랜드계 관리 집안들로, 고대 제국의 수리 기술과 기록 방식을 대대로 물려받았다. 수문지기장은 대수문의 열쇠를 맡았고, 각 수로 구역의 수문지기들은 물을 나누는 날짜와 양을 정하고 마을들에게서 물세를 거두었다.
691년 개종 뒤로는 교회가 세 번째 계통으로 더해졌다. 성직자들은 공작의 명령과 약정을 그리스어 문서로 남기고 물세와 공납을 장부에 적었으며, 7세기 말에는 수문지기들의 일 가운데 기록과 회계의 상당 부분을 넘겨받았다.
6.3. 공작 회의 [편집]
큰일은 공작 회의(Кнежевъ зборъ)에서 논의했다. 종사단의 우두머리들과 수문지기장, 그리고 692년 이후에는 주교가 참석해 전쟁과 강화, 공납, 공작의 후계를 논의했다. 공작 회의는 공작을 묶는 기구가 아니라 공작이 큰일에 앞서 지지를 모으는 자리였지만, 688년처럼 공작의 자리가 비었을 때는 사실상 후계를 정하는 자리가 되었다. 제정 시대 중세의 신분 회의 사보르는 이 공작 회의에서 비롯되었다.
6.4. 법 [편집]
공국에는 성문 법전이 없었다. 슬라브인 사이의 다툼은 슬라브인의 관습법으로, 물에 관한 다툼은 고대 제국 이래 수문지기들이 지켜 온 물의 관습으로 판가름했다. 물의 관습은 마을마다 물을 받는 차례와 날짜를 정하고, 수로 공사에 나오지 않은 마을은 다음 물을 받지 못하게 하는 등의 규칙으로 이루어져 있었다. 이 관습들은 963년 제정의 미하일로 1세가 반포한 《미하일로 법전》에 정리되어 들어갔다.
7. 경제 [편집]
7.1. 관개 농업과 물세 [편집]
공국의 경제는 수로의 물로 짓는 밀과 보리 농사에 기대었다. 마을들은 수로의 물을 받는 대가로 수확의 일부를 물세로 바쳤고, 수로를 청소하고 둑을 고치는 공사에 사람을 내야 했다. 물세는 수확량이 아니라 받은 물의 양에 따라 매겼기 때문에, 공작은 들판이 넓어질수록 더 많은 세금을 거둘 수 있었다. 공작들이 정복지의 사람들을 수로 공사에 동원하고 흙에 묻힌 수로를 되살리는 데 힘을 쏟은 것도 이 때문이다.
7.2. 빌베른 교역 [편집]
강 굽이의 빌베른 거류지는 공국을 바깥 세계와 잇는 창구였다. 공국은 곡물과 북쪽 삼림의 모피, 밀랍, 꿀, 그리고 평원의 말을 내다 팔았고, 빌베른 상인들에게서 은과 소금, 철제 무기, 포도주, 고급 직물을 사들였다. 634년 베레스 협약 이후 공작은 거래액의 10분의 1을 통행세로 받았는데, 이 은이 종사단의 녹봉이 되었다. 분열기의 다른 영주들이 공납으로 거둔 곡물로 전사들을 먹였다면, 인크론슈타트의 공작은 은으로 전사들을 샀다. 은을 받는 전사들은 공작에게 더 오래, 더 충성스럽게 머물렀다.
7.3. 화폐 [편집]
공국은 자체 화폐를 찍지 않았다. 큰 거래에는 빌베른 은화와 무게를 달아 쓰는 은 조각이, 작은 거래에는 땅속에서 나온 고대 제국의 동전이 쓰였으며, 마을에서는 곡물과 가축으로 물건을 바꾸었다. 20세기 이후 인크론슈타트의 거류지 터에서는 7세기의 빌베른 은화 2,000여 닢이 묻힌 항아리가 여러 차례 발굴되었다.
8. 사회 [편집]
공국의 사회는 위에서부터 공작의 가문, 종사단의 전사 귀족과 수문지기 집안, 자유 농민, 예속민으로 이루어졌다. 강 굽이의 빌베른 거류민은 이 질서 바깥에서 자기들의 법으로 살았다.
슬라브인 농민들은 자드루가라 불리는 대가족 공동체를 이루어 함께 땅을 갈았다. 옛 사랜드계 마을들은 수로 하나를 함께 쓰는 마을들끼리 수문 공동체를 이루어 물을 받는 차례를 정하고 수로 공사에 사람을 냈다. 수문 공동체는 712년 수문법 이후 수문이 영주의 봉토가 된 뒤에도 마을의 물 관리 조직으로 살아남아, 1918년 사랜드 공화국의 농노제 폐지 때 수리권을 넘겨받는 주체가 되었다.
예속민은 주로 전쟁 포로와 그 자손으로, 수로 공사와 공작의 영지 경작에 동원되었다. 공국 시절의 예속민은 아직 땅에 묶인 농노가 아니었고, 공을 세우거나 몸값을 치르면 자유민이 될 수 있었다.
공국이 이어진 117년 동안 슬라브인과 옛 사랜드인은 빠르게 섞였다. 지배층에서는 공작가처럼 두 계통이 혼인으로 얽혔고, 마을에서도 슬라브인 이주민과 옛 사랜드인이 이웃해 살며 혼인했다. 7세기 말에는 옛 사랜드인 대부분이 슬라브어를 쓰게 되었고, 옛 사랜드어는 수문지기 집안의 기록과 물에 관한 낱말 속에만 남았다.[10]
슬라브인 농민들은 자드루가라 불리는 대가족 공동체를 이루어 함께 땅을 갈았다. 옛 사랜드계 마을들은 수로 하나를 함께 쓰는 마을들끼리 수문 공동체를 이루어 물을 받는 차례를 정하고 수로 공사에 사람을 냈다. 수문 공동체는 712년 수문법 이후 수문이 영주의 봉토가 된 뒤에도 마을의 물 관리 조직으로 살아남아, 1918년 사랜드 공화국의 농노제 폐지 때 수리권을 넘겨받는 주체가 되었다.
예속민은 주로 전쟁 포로와 그 자손으로, 수로 공사와 공작의 영지 경작에 동원되었다. 공국 시절의 예속민은 아직 땅에 묶인 농노가 아니었고, 공을 세우거나 몸값을 치르면 자유민이 될 수 있었다.
공국이 이어진 117년 동안 슬라브인과 옛 사랜드인은 빠르게 섞였다. 지배층에서는 공작가처럼 두 계통이 혼인으로 얽혔고, 마을에서도 슬라브인 이주민과 옛 사랜드인이 이웃해 살며 혼인했다. 7세기 말에는 옛 사랜드인 대부분이 슬라브어를 쓰게 되었고, 옛 사랜드어는 수문지기 집안의 기록과 물에 관한 낱말 속에만 남았다.[10]
9. 종교 [편집]
개종 이전 공국에는 두 갈래의 신앙이 있었다. 슬라브인들은 천둥의 신 페룬을 비롯한 슬라브의 신들을 섬겼고, 옛 사랜드인들은 강과 샘의 정령을 섬기며 그리핀을 물과 곳간을 지키는 수호수로 여겼다. 대수문에는 해마다 첫 물을 흘려보내는 날 수문지기들이 정령에게 제물을 바치는 의례가 있었다.
691년 인터르스키의 세례 뒤 정교회가 공작가와 종사단의 신앙이 되었다. 692년 인크론슈타트에 주교좌가 설치되고 706년 대주교좌로 승격되었으며, 이 대주교좌는 1346년 사랜드 정교회의 총대주교좌가 된다. 공국 시절 교회의 전례와 문서는 그리스어였고, 슬라브어 전례가 들어온 것은 9세기 말의 일이다.
교회는 옛 신앙을 없애기보다 그 위에 덧입혔다. 대수문에 첫 물을 흘려보내던 옛 의례는 신현 축일에 강물을 축복하는 정교회의 '물 축성'과 합쳐져, 대주교가 대수문의 물을 축복하는 행사가 되었다. 그리핀도 이교의 짐승으로 버려지지 않고 '하느님이 내린 물을 지키는 짐승'으로 다시 해석되어 711년 차르의 문장에 올랐다. 시골에서는 개종 뒤에도 오랫동안 옛 신들을 섬겼으며, 693년에는 개종에 반발한 종사단 일부와 토착 신앙의 사제들이 봉기하기도 했다.
691년 인터르스키의 세례 뒤 정교회가 공작가와 종사단의 신앙이 되었다. 692년 인크론슈타트에 주교좌가 설치되고 706년 대주교좌로 승격되었으며, 이 대주교좌는 1346년 사랜드 정교회의 총대주교좌가 된다. 공국 시절 교회의 전례와 문서는 그리스어였고, 슬라브어 전례가 들어온 것은 9세기 말의 일이다.
교회는 옛 신앙을 없애기보다 그 위에 덧입혔다. 대수문에 첫 물을 흘려보내던 옛 의례는 신현 축일에 강물을 축복하는 정교회의 '물 축성'과 합쳐져, 대주교가 대수문의 물을 축복하는 행사가 되었다. 그리핀도 이교의 짐승으로 버려지지 않고 '하느님이 내린 물을 지키는 짐승'으로 다시 해석되어 711년 차르의 문장에 올랐다. 시골에서는 개종 뒤에도 오랫동안 옛 신들을 섬겼으며, 693년에는 개종에 반발한 종사단 일부와 토착 신앙의 사제들이 봉기하기도 했다.
10. 군사 [편집]
공국 군대의 핵심은 공작의 종사단이었다. 종사단은 빌베른제 철검과 미늘 갑옷을 갖춘 기마 전사들로, 보이슬라프 때 300명 남짓에서 인터르스키 때는 1,500명 안팎으로 늘어났다. 큰 전쟁 때는 마을에서 농민들을 불러 모아 창병과 궁병으로 썼는데, 709년 브로드 전투에는 종사단과 함께 1만 명 가까운 징집병이 나섰다고 한다.
공국의 가장 강력한 무기는 칼이 아니라 물이었다. 공작들은 반항하는 하류의 영주에게 대수문을 닫아 물을 끊었고, 적이 쳐들어오면 수로를 터서 들판을 진창으로 만들어 기병의 발을 묶었다. 665년의 '목마른 여름'과 706년 옛 물길의 수문을 닫은 일은 모두 싸우지 않고 적을 굴복시킨 '수문 전쟁'의 대표적인 예로 꼽힌다.
방어는 성채에 기대었다. 공국은 슬라브식 목책 성채인 '그라드'를 곳곳에 세웠고, 고대 제국이 수로를 지키려고 쌓은 돌탑들을 고쳐 망루로 썼다. 북쪽 고원의 약탈에 맞서 프로시고이가 협곡에 쌓은 성채들은 제정 시대에도 고원 방어선의 일부로 쓰였다.
공국의 가장 강력한 무기는 칼이 아니라 물이었다. 공작들은 반항하는 하류의 영주에게 대수문을 닫아 물을 끊었고, 적이 쳐들어오면 수로를 터서 들판을 진창으로 만들어 기병의 발을 묶었다. 665년의 '목마른 여름'과 706년 옛 물길의 수문을 닫은 일은 모두 싸우지 않고 적을 굴복시킨 '수문 전쟁'의 대표적인 예로 꼽힌다.
방어는 성채에 기대었다. 공국은 슬라브식 목책 성채인 '그라드'를 곳곳에 세웠고, 고대 제국이 수로를 지키려고 쌓은 돌탑들을 고쳐 망루로 썼다. 북쪽 고원의 약탈에 맞서 프로시고이가 협곡에 쌓은 성채들은 제정 시대에도 고원 방어선의 일부로 쓰였다.
11. 역대 공작 [편집]
대 | 이름 | 재위 | 비고 |
1 | 보이슬라프 | 594~619 | 공국 성립 |
2 | 라도슬라프 | 619~641 | 베레스 협약 |
3 | 프로시고이 | 641~658 | 협곡 성채 |
4 | 블라스티미르 | 658~670 | 목마른 여름 |
5 | 고이니크 | 670~671 | 9세에 즉위 |
6 | 무티미르 | 671~688 | 찬탈 |
7 | 688~711 | 711년 칭제 |
12. 711년 이후: 인크론슈타트 공작 [편집]
12.1. 칭호의 성립 [편집]
711년 차르가 된 인터르스키 1세는 공작의 칭호를 버리지 않고 여덟 살 난 맏아들 인터르스키(훗날의 인터르스키 2세)에게 주었다. 이때부터 인크론슈타트 공작(Кнез инкронштатски)은 제위 계승자의 칭호가 되어, 1917년 제정이 무너질 때까지 1,200년 넘게 이어졌다. 차르가 공작의 칭호를 맏아들에게 물려준 것은 차르의 자리가 공국에서 나왔음을 잊지 않겠다는 뜻이었고, 동시에 다음 차르가 누구인지를 일찍 못 박아 두려는 뜻이었다.
계승자는 열여섯 살이 되면 인크론슈타트에서 공작 서임식을 치렀다. 서임식은 공국 시절 공작의 즉위 의식을 그대로 이어받은 것으로, 계승자는 차르에게서 수문 열쇠를 받아 수문 구역의 수문을 손수 열었다. 서임을 받은 공작은 인크론슈타트의 공작궁에 머물렀고, 베레스 강 상류의 물세를 거두는 공작령을 받아 그 수입으로 자기 궁정을 꾸렸다. 공작령은 공국의 본령이었던 땅으로, 제정 내내 차르의 다른 직할령과 따로 관리되었다.
계승자는 열여섯 살이 되면 인크론슈타트에서 공작 서임식을 치렀다. 서임식은 공국 시절 공작의 즉위 의식을 그대로 이어받은 것으로, 계승자는 차르에게서 수문 열쇠를 받아 수문 구역의 수문을 손수 열었다. 서임을 받은 공작은 인크론슈타트의 공작궁에 머물렀고, 베레스 강 상류의 물세를 거두는 공작령을 받아 그 수입으로 자기 궁정을 꾸렸다. 공작령은 공국의 본령이었던 땅으로, 제정 내내 차르의 다른 직할령과 따로 관리되었다.
12.2. 몽골 점령기와 칭호의 부활 [편집]
1259년 몽골군이 인크론슈타트를 함락하면서 마지막 차르 블라디슬라프 4세가 전사했고, 그의 맏아들인 인크론슈타트 공작도 궁정 사람들과 함께 성모안식 대성당으로 피신했다가 대성당과 함께 불타 죽었다. 성 게오르기 성당 자리에 1172년 세워진 이 대성당이 불탈 때, 대성당의 보물고에 있던 나르샤 가문의 수문 열쇠와 그리핀 인장도 함께 사라졌다.[11] 이후 32년 동안 칭호는 비어 있었다.
1291년 인크론슈타트를 되찾고 즉위한 스테판 1세는 살아남은 인크론슈타트 왕가의 공주 밀레나와 혼인했다. 1293년 두 사람 사이에서 맏아들 스테판(훗날의 스테판 2세)이 태어나자, 스테판 1세는 갓난아이에게 곧바로 인크론슈타트 공작의 칭호를 내렸다. 옛 왕가의 피를 이은 아들에게 옛 왕가의 칭호를 줌으로써 새 왕조가 옛 왕조를 이었음을 보여 주려는 것이었다. 스테판 1세는 같은 해 잃어버린 열쇠 대신 차르가 대관식에서 쓸 금 열쇠와 공작이 서임식에서 쓸 은 열쇠를 새로 만들게 했다. 이때부터 금은 차르의 색, 은은 공작의 색이 되었다.
1291년 인크론슈타트를 되찾고 즉위한 스테판 1세는 살아남은 인크론슈타트 왕가의 공주 밀레나와 혼인했다. 1293년 두 사람 사이에서 맏아들 스테판(훗날의 스테판 2세)이 태어나자, 스테판 1세는 갓난아이에게 곧바로 인크론슈타트 공작의 칭호를 내렸다. 옛 왕가의 피를 이은 아들에게 옛 왕가의 칭호를 줌으로써 새 왕조가 옛 왕조를 이었음을 보여 주려는 것이었다. 스테판 1세는 같은 해 잃어버린 열쇠 대신 차르가 대관식에서 쓸 금 열쇠와 공작이 서임식에서 쓸 은 열쇠를 새로 만들게 했다. 이때부터 금은 차르의 색, 은은 공작의 색이 되었다.
12.3. 혼란기의 칭호 [편집]
1591년 우로시 3세의 외아들인 인크론슈타트 공작 드미트리가 아홉 살의 나이로 인크론슈타트의 공작궁에서 갑자기 죽었다. 즐라토미로비치 왕조의 마지막 공작이었던 그의 죽음은 1597년 왕조 단절과 혼란기로 이어졌다.
1604년 서부 국경에 나타난 '가짜 드미트리'는 처음에는 차르가 아니라 '살아 있는 인크론슈타트 공작 드미트리'를 자칭했다. 그는 자신이 1591년 공작궁에서 암살자의 손을 피해 빠져나왔다고 주장했고, 정당한 계승자로서 제위를 되찾겠다고 내세웠다. 1606년 인크론슈타트에 들어간 그는 그제야 차르를 칭했다. 공작의 칭호가 제위로 가는 정당한 길로 여겨졌기에 가능한 주장이었다.
1604년 서부 국경에 나타난 '가짜 드미트리'는 처음에는 차르가 아니라 '살아 있는 인크론슈타트 공작 드미트리'를 자칭했다. 그는 자신이 1591년 공작궁에서 암살자의 손을 피해 빠져나왔다고 주장했고, 정당한 계승자로서 제위를 되찾겠다고 내세웠다. 1606년 인크론슈타트에 들어간 그는 그제야 차르를 칭했다. 공작의 칭호가 제위로 가는 정당한 길로 여겨졌기에 가능한 주장이었다.
12.4. 천도 이후 [편집]
1661년 수도가 인터그라드로 옮겨 가자 공작도 인터그라드의 궁정으로 거처를 옮겼다. 인크론슈타트의 공작궁은 서임식 때만 쓰는 곳이 되었고, 칭호는 실제 영지를 다스리는 자리에서 계승자를 가리키는 이름으로 바뀌었다. 다만 서임식만은 차르의 대관식과 마찬가지로 끝까지 인크론슈타트에서 열었다.
1762년 궁정 정변으로 옐레나 1세가 즉위한 뒤에도 그녀의 아들 알렉산다르는 공작의 칭호를 지켰다. 그는 1796년 즉위할 때까지 34년 동안 공작으로 지내 가장 오래 이 칭호를 지닌 사람이 되었다. 차르가 된 그는 1797년 제위계승법을 반포하면서 칭호의 주인도 함께 정했다. 이 법에 따라 인크론슈타트 공작의 칭호는 차르의 맏아들, 맏아들이 없으면 맏손자에게만 자동으로 주어졌으며, 차르의 아우처럼 계승 순위만 앞선 사람은 '대공'으로 불렸다.
1858년 페타르 3세의 문장 개혁은 공작의 깃발과 문장을 정식으로 정했다. 공작의 깃발은 7세기의 묘사를 재현한 자주 바탕의 은빛 성탑기였고, 공작의 문장은 공국 시절의 문장에 계승자의 관을 얹은 것이었다.
1762년 궁정 정변으로 옐레나 1세가 즉위한 뒤에도 그녀의 아들 알렉산다르는 공작의 칭호를 지켰다. 그는 1796년 즉위할 때까지 34년 동안 공작으로 지내 가장 오래 이 칭호를 지닌 사람이 되었다. 차르가 된 그는 1797년 제위계승법을 반포하면서 칭호의 주인도 함께 정했다. 이 법에 따라 인크론슈타트 공작의 칭호는 차르의 맏아들, 맏아들이 없으면 맏손자에게만 자동으로 주어졌으며, 차르의 아우처럼 계승 순위만 앞선 사람은 '대공'으로 불렸다.
1858년 페타르 3세의 문장 개혁은 공작의 깃발과 문장을 정식으로 정했다. 공작의 깃발은 7세기의 묘사를 재현한 자주 바탕의 은빛 성탑기였고, 공작의 문장은 공국 시절의 문장에 계승자의 관을 얹은 것이었다.
12.5. 칭호의 소멸 [편집]
13. 평가 [편집]
제정 시대의 공식 역사에서 인크론슈타트 공국은 '제정의 요람'이었다. 19세기 낭만주의 계승론은 특히 나르샤 가문의 피를 강조해, 공국을 고대 제국의 정통이 슬라브인의 칼을 만나 되살아난 나라로 그렸다. 세미라는 고대 제국의 마지막 불씨를 지킨 여인으로 시와 그림의 소재가 되었고, 국가가 주문한 역사화 《인터르스키 1세의 대관》(1874)과 오페라 《인터르스키》(1852)는 공국의 마지막 장면을 제정의 탄생 신화로 만들었다. 반면 빌베른 상인의 거류지나 슬라브인 무리의 약탈 같은 이야기는 이 시대의 역사 서술에서 거의 다루어지지 않았다.
사비에트의 공식 역사는 공국을 정반대로 보았다. 사비에트 역사학에서 공국은 '물을 빼앗아 칼로 지킨 나라'였고, 대수문의 열쇠는 1,200년 동안 이어진 영주 수리권의 첫 번째 상징이었다. 사비에트 교과서는 공작들이 물을 끊어 하류의 마을들을 굶주리게 한 '목마른 여름'을 공국의 본질로 가르쳤으며, 그 반대편에서 물을 함께 나누어 온 수문 공동체를 인민의 전통으로 높였다.
1990년대 이후의 연구는 두 시각 모두에서 거리를 둔다. 1960년대부터 이어진 거류지 터의 발굴은 빌베른 은화와 장부 조각을 대량으로 찾아내, 공국의 성장에 빌베른 교역이 연대기의 서술보다 훨씬 큰 몫을 했음을 보여 주었다. 일부 연구자들은 688년 인터르스키의 즉위를 빌베른 상인들이 자금을 댄 정변으로 보며, 고이니크의 죽음과 무티미르의 찬탈에 관한 연대기의 서술도 인터르스키 가계의 정통성을 세우려는 후대의 손질이 들어갔다고 의심한다.
사비에트의 공식 역사는 공국을 정반대로 보았다. 사비에트 역사학에서 공국은 '물을 빼앗아 칼로 지킨 나라'였고, 대수문의 열쇠는 1,200년 동안 이어진 영주 수리권의 첫 번째 상징이었다. 사비에트 교과서는 공작들이 물을 끊어 하류의 마을들을 굶주리게 한 '목마른 여름'을 공국의 본질로 가르쳤으며, 그 반대편에서 물을 함께 나누어 온 수문 공동체를 인민의 전통으로 높였다.
1990년대 이후의 연구는 두 시각 모두에서 거리를 둔다. 1960년대부터 이어진 거류지 터의 발굴은 빌베른 은화와 장부 조각을 대량으로 찾아내, 공국의 성장에 빌베른 교역이 연대기의 서술보다 훨씬 큰 몫을 했음을 보여 주었다. 일부 연구자들은 688년 인터르스키의 즉위를 빌베른 상인들이 자금을 댄 정변으로 보며, 고이니크의 죽음과 무티미르의 찬탈에 관한 연대기의 서술도 인터르스키 가계의 정통성을 세우려는 후대의 손질이 들어갔다고 의심한다.
14. 여담 [편집]
- '인터르스키'라는 이름은 슬라브식 이름처럼 보이지 않아 그 기원을 두고 여러 설이 있다. 나르샤 가문에서 내려온 옛 사랜드어 이름을 슬라브식으로 바꾼 것이라는 설과, 그가 자란 빌베른 거류지에서 붙은 별명이라는 설이 대표적이다. 정교회 세례명은 미하일이었으나 공적으로는 거의 쓰이지 않았다.
- 인터르스키는 688년 공작이 된 뒤 742년 차르로 세상을 떠날 때까지 54년 동안 다스렸다. 공작으로 23년, 차르로 31년이다.
- 1894년은 공국 성립 1,300주년이었다. 바로 그해 라자르 2세의 대관식에서 대수문이 녹슬어 열리지 않았다는 일화가 전하는데, 제정이 무너진 뒤 사람들은 이를 두고 '1,300년 만에 물이 멈췄다'고 했다.
- 19세기 낭만주의 시대에 '세미라'는 귀족과 도시민 사이에서 유행한 여자 이름이 되었다. 본래 슬라브식 이름이 아니어서 정교회는 세례명으로 인정하지 않았기 때문에, 세미라라는 이름을 쓰는 여성들은 따로 세례명을 받아야 했다.
- 오페라 《인터르스키》의 2막은 빌베른 거류지에서 자라는 소년 인터르스키를 그린다. 거류지의 빌베른 상인들은 오페라에서 우스꽝스러운 조연으로 나오는데, 1960년대 거류지 발굴로 그들의 역할이 재평가되자 사비에트의 극장들은 이 장면을 고쳐 무대에 올렸다.
- 대수문은 수없이 고쳐 지으며 20세기 중반까지 실제로 쓰였다. 고대 제국 시대의 돌 기단은 지금도 남아 있으며, 성모안식 대성당과 함께 사비에트의 국가 문화재로 지정되어 있다.
[1] 7세기 빌베른 상인의 기록에 남은 묘사를 바탕으로 1858년 문장 개혁 때 재현한 도안이다.[2] "보다 이 마치!"로 읽는다.[3] 고대 사랜드 제국의 서부 수리관 가문인 나르샤 가문이 다스린 영지.[4] 공국은 자체 화폐를 찍지 않았다.[5] 1919년 철자 개정 이전 표기.[6] 거류지의 이름. 공국을 가리킬 때는 '엔크론스타트의 왕국'이라 했다.[7] 로마자 표기 'Inkronstadt'는 19세기 외국 지도에서 퍼진 것으로, 독일어의 'Stadt(도시)'와는 아무 관계가 없다. 독일어처럼 보이는 표기 탓에 외국에서는 이 도시를 게르만인이 세운 곳으로 오해하는 일이 잦았다.[8] 스트로이미르는 고원 제후들의 힘을 빌려 여러 차례 공국을 습격하다가 695년 협곡의 성채 앞에서 전사했다.[9] 이 하구는 964년 뒤인 1661년 새 수도 인터그라드가 세워지는 곳이다.[10] 오늘날 사랜드어에서 수문·수로·물 분배에 관한 낱말 가운데 상당수는 슬라브어가 아니라 옛 사랜드어에서 온 것이다.[11] 1291년 인크론슈타트를 되찾은 스테판 1세가 즉위 뒤 수문을 열지 못하고 맨손으로 흙둑을 허물어 물을 흘려보냈다는 일화는 이 때문이다.